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3세 (문단 편집) === 제8차 위그노 전쟁(세 앙리의 전쟁, 1587~1589) === 1584년 2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네덜란드]]의 '국부' [[빌럼 1세(오라녀)|오라녜 공 빌렘]]에 의해 네덜란드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안트베르펜]]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동생 프랑수아가 죽으면서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 과정이 새로운 국면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앙리 3세의 슬하에 뒤를 이을 자식들이 없었고, 다른 형제들도 후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왕위계승권은 앙리 3세의 매부이자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나바르의 왕 앙리 드 부르봉에게 넘어갔다. 이에 국내외의 가톨릭은 프랑스의 왕위가 개신교도인 나바르의 앙리에게 넘어가는 것에 반발했고, 가톨릭 동맹을 다시 일으켜 나바르의 앙리의 숙부이긴 했지만 가톨릭 신자이며 노르망디의 루앙 [[추기경]]이었던 샤를 드 부르봉을 [[환속]]시켜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내세우는 등 국내 정세가 불안정해졌다. 급기야 1585년 7월 18일 가톨릭 동맹과 손을 잡아 발루아 왕가의 왕권을 강화시키려하는 태후 카트린의 설득으로 위그노들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으나 선포 이후 군중들의 환희에 답하지 않고 떠났기에 가톨릭의 경멸을 받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의 자유을 박탈당한 위그노로부터도 반발을 불러 일으켜 나바르의 앙리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로부터 경고를 받게 되었다. 결국 1년 6개월이 지나 프랑스 전역이 다시 한번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고, 이 내전이 바로 오늘날 '''세 앙리의 전쟁'''이라 불린 '''제8차 위그노 전쟁'''(1587~1589)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앙리 3세는 여전히 사치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쿠트라 전투'''에서 총신인 국왕군 총지휘관 주아이외즈 공작을 비롯한 국왕군 8,000명이 궤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점차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앙리 드 기즈의 공작으로 수도 파리 내에서 국왕으로서의 위신이 실추되기 시작했다. 1588년 5월 12일, 결국 파리에서 앙리 드 기즈의 농간으로 보이는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모후인 카트린이 앙리 드 기즈와 협상을 하는 동안 측근들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해 샤르트르로 피신하고 말았다. 앙리 3세가 파리를 탈출하면서 유리해진 것은 앙리 드 기즈였으나, 그 또한 파리를 점거하면서 가톨릭 동맹 내에 발생하는 파벌싸움을 제어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자 두 사람의 앙리는 태후 카트린의 중재하에 다시 협상을 했다. 1588년 7월 19일 앙리 3세는 11개의 조항으로 된 '''루앙 연맹조약'''을 발표하고, 3일 뒤 이 조약은 파리의 대법원에 등록되었다. 그가 발표한 연맹조약 안에는 위그노들에게 느무르 조약보다 더 가혹한 조항이 있었고, 이는 앙리 3세에게도 가혹한 것으로 부르주, 오를레앙 등 4개의 도시를 가톨릭 동맹에게 제공하는 것 등이었다. 이는 순전히 앙리 드 기즈와 가톨릭 동맹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켰다. 10월 16일 루앙 연맹조약을 명문화하기 위해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개최하면서 앙리 1세 드 기즈와 그의 동생인 로렌의 추기경 루이 2세 드 기즈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12월 23일 암살 계획을 실행해 앙리 드 기즈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살해하고, 그의 동생인 루이 또한 살해한 후, 가톨릭 동맹이 내세운 자신의 또 다른 후계자인 샤를 드 부르봉을 포함한 기즈의 측근들을 체포했다. 1589년 1월 5일 앙리 3세의 정치적 충고자이면서 후원자였던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하면서, 암살당한 앙리 드 기즈와 루이 드 기즈의 동생이었던 마옌느 공작 샤를을 비롯한 가톨릭 동맹에 의해 왕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대도시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국왕 앙리 3세에게 적대감을 표했으며, 삼부회마저 등을 돌린데다 표면적으로나마 충성을 표하던 파리의 대법원 또한 1월 16일, 16인 위원회에 의해 해산되고 가톨릭 동맹을 대변하는 새 대법원이 세워지면서 프랑스 전역의 고등법원마저 가톨릭 동맹편에 서는 등 앙리 3세의 모든 권력과 명예가 실추되었다. 가톨릭 동맹에 완전히 버림받은 앙리 3세는 그나마 손을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위그노의 수장인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 밖에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바르의 앙리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앙리 3세는 블루아에서 투르로 거처를 옳겼다. 1589년 4월 3일 두 사람의 앙리는 1년 기한의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한 후 같은 해 4월 29일에 각자 조약을 발표했다. 5월 8일 가톨릭 동맹군이 투르로 쳐들어왔으나, 앙리 드 부르봉이 이끌던 위그노군에 의해 앙리 3세는 구원을 받았다. 이후 앙리 3세는 나바르의 앙리와 함께 수도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2개월 동안 준비를 한 후 같은 해 7월 말에 4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 후 파리 서쪽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1589년 8월 1일 파리가 포위되는 와중에 브레앙 백작이 보낸 자라고 말한 [[도미니코회]]의 [[수도자]] 자크 클레망(Jacques Clément)을 맞이했다. 앙리 3세가 근위병들이 멀리 떨어져있어 자크 클레맹이 갖고 온 편지에 주의를 팔고 있는 사이, 자크가 몰래 숨겨둔 단검을 꺼내고는 이를 휘둘러 복부를 심하게 찔리는 부상을 당했고, 곧 그를 밀쳐내며 근위병을 불렀다. 이에 근위병들이 달려와 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자크 클레맹을 죽이고[* 근위병들의 검과 미늘창에 찔리고 베여서 끔찍하게 죽었다. 특히 사후 시신이 토막나고 불태워져 파괴된다.], 의사를 불렀다. 급히 달려온 의사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앙리 3세는 이미 심한 중상을 입었기에 병상에 누웠다. 상태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하나 문병차 온 후계자인 앙리 드 부르봉에게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할 것을 권했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앙리 드 부르봉에게 충성할 것을 명령한 뒤 구술로 왕비와 아직도 자신에게 복종하는 지방의 총독 및 제후들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 다음날 오전 2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오던 [[발루아 왕조]]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앙리 3세에게 후사는 없었고, 그의 뒤를 이어 매부였던 앙리 드 부르봉이 즉위해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국왕 [[앙리 4세]]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